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삼포 가는 길

dajv 2024. 2. 2. 00:24


‘삼포 가는 길’에서 바닷가 포차에서 나온 사내는 잠시 주춤하여 컴컴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 듯했다. 눈 그친 하늘은 불투명한 얼음처럼 하얗게 얼어있었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어망더미 위에는 내린 눈이 빙수처럼 덮여있다. 담뱃불을 붙인 그의 눈길에 흐릿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허름한 유리문이 보인다. 사내는 그쪽으로 몸을 돌려 걷는다. 바닷가 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그의 콧등과 귓덜미를 베며 지나간다. 휘잉~ 사내는 밭전(田)자 모양의 유리창이 달려 있는 오래된 나무문짝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좀 늦었지만 술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리 앉으세요.” 화장기 짙은 중년의 여자가 자리를 권하며 꾸며진 웃음을 던진다. 여자가 주방 쪽으로 들어가자 좀 더 젊은 다른 여자가 간단한 안주거리와 물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아마도 이 여자는 종업원일 것이라 사내는 짐작한다. 제법 눈길을 끄는 용모를 가진 여자다. 순간 사내는 소년시절의 이모들이 떠오른다. 시도 때도 없는 기억의 침입, 사내는 당혹스럽다. “뭘로 드릴까요?” “글쎄, 아무 거나, 독한 것이 좋겠네요.” “어머, 그럼 양주로 드릴까요? 우리 집에 양주도 있는데” “아뇨, 그냥 소주로 주세요, 얼큰한 안주로 해서” “여기 분이 아니시죠? 출장 오셨나 봐요? 여행하시는 분 같지는 않고” “……. 그냥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아침바다가 보고 싶어서, 아침까지 달릴 작정으로 왔는데……. 아침은커녕 새벽도 오기 전에 길이 끝났고 말았네요, 후후” 사내의 어투엔 쓸쓸함이 물씬 배어있다. “어머,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보다 호호~ 그죠?” 사내는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담배를 꺼내 문다. 불과 몇 시간 전 사내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회사는 부도처리 되었고 모든 부동산은 빨간 딱지와 함께 법원의 소유가 되었다. 아니다. 소장을 낸 채권자들을 위한 담보로 법원에 맡겨졌다. 아내의 이름으로 등기된 집 한 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IMF가 터지면서 하청의 대가로 받아두었던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사내는 빚쟁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직원들의 임금까지 떼어 먹은 악덕경영주가 되어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봐, 내 돈 어떡할 거야? 당신 믿고 빌려준 생떼 같은 내 돈, 조금이라도 꼬불쳐두었을 거 아냐?” “이런 씨팔, 어음이고 나발이고 개 발싸개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해결해 빨리, 안 그러면 당신 죽고 나 죽는 거야” “사장님, 사장님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일 시킨 것은 해결해주셔야죠? 밀린 기름 값에 부속 값에 당장 굶어 죽어요, 우린” 큰 토목공사의 골재수급권을 따내자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덤볐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 제 돈은 투자금이 아니며 빌려준 돈이란다. 임차한 중기업자들은 사기네 형사고소네 하며 으름장을 놓고 채권자들은 아무 때고 들이닥쳐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그 좋다는 직장을 차고나와 사업에 손을 댄 것은 물론 사내의 욕심 탓이었다. 쥐꼬리 같은 봉급으로 어느 세월에 돈 벌어 떵떵거리며 살까? 사내는 한 방, 그 한 방으로 밑바닥 진창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향응과 접대와 갖은 뇌물로 골재수급권을 따냈다. 한 동안은 제법 돈도 만지며 개천에서 난 용이 될 부푼 꿈을 꾸었었다. 그러나 IMF와 함께 그의 헛된 욕망을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개천은커녕 하수구의 진창에도 사내가 설 곳은 없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어떻게 살 거냐고, 애들은 커가고 뭘 먹고 살 거야? 응, 그러기에 무슨 사업씩이나? 송충이가 솔잎이나 먹고 살아야지 주제에 가당키나 한 짓이냐고? 이렇게는 더는 못살아, 못산다고” 아내는 닦달을 했고 갈수록 히스테리는 심해졌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사내는 점차 죽어갔다. 정신은 쇠약해졌고 의지는 무너져 내렸다. 세상은 야박했다. 사정과 이해는 돈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어디에도 위로 같은 것은 없었다. 세상은 사내를 그가 그리 원했던 한 방으로 세상에서 묻어버리고 지워버렸다. 사내는 더 이상 산목숨이 아니었다. “궁금하다? 이렇게 젠틀한 남자가 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곳에 밤늦게 찾아왔는지?” 어느새 사내의 옆자리로 옮겨 앉은 여자는 추파를 던져가며 사내를 구석구석 살핀다. 여자의 손은 어느 틈에 사내의 허벅지를 더듬고 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죽겠네. 말 해봐요, 신사오빠?” 처음 인사를 했던 주인 여자가 매운탕 냄비를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신사? 후후, 사연은 무슨…….” “아가씨는 이름이 뭐에요?” 사내는 몸을 붙여오는 옆의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이름요? 사연이 뭔지 물었는데 뚱딴지 같이 제 이름은 왜요? 이름 알아서 어디다 쓰시게요? 오빠”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훗~ 혹시 이점례라고 아세요?” “이점례? 그게 누군데요? 여기에 살아요? 혹시 그 분 찾아오신 거예요? 도망간 애인인가? 크크” “그런가보다, 호호호, 이 아저씨 좀 엉뚱한 분이네” 맞은편의 여자가 은근한 눈짓과 함께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친다. “아뇨,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이 나서요. 그런 거 아닙니다.” 사내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술잔을 목을 젖혀 털어 넣는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 오랫동안 말이 없다. 그녀의 이름이 백화, 아니 이점례였지. 그 이름은 사내에게 수많은 이모들의 이름이었고 세상의 억울한 이들의 이름이었으며 이 천박하고 몹쓸 세상에서 가장 순정한 여인의 이름이기도 했다. 공순이라 무시를 당하면서도 시골집의 가난과 비루한 삶을 온 몸으로 감당해낸 누나들의 이름이었고 미자(몰개월의 새)였으며 영자(영자의 전성시대)였다. 그 이름은 어둡고 컴컴한 세상에서도 죽지 않고 꽃을 피운 한 떨기 야생화였다. 까까머리 소년은 어느 날 이모들을 따라 시골 극장에 갔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제목이 생각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지만 소년의 기억에 그 영화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심어 놓았다. 영화 때문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던 이모들이 눈물을 철철 흘리더니 종내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울음은 그칠 줄 몰랐고 소년은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년은 (어차피 관람불가인) 영화를 볼 수 없었고 눈물이 마르도록 슬피 울기만한 이모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 극장을 나왔다. 극장을 나온 이모들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녁이 되자 다시 술을 따랐고 노래를 불렀으며 이름 모를 사내들과 잠자리에 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있는 이 선술집이 소년의 집과 같다는 생각을 지금 막 하는 중이다. 그리고 옆에 앉아 제 잔에 술을 따르는 이 여자가 바로 이모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기억은 그렇게 아무 때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사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이모들은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술을 따르다가도 어느 때는 술병을 깨고 발악을 하며 발가벗고 손님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리곤 어제와 다른 남자와 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술상도 치우지 않은 그 퀴퀴한 방구석에선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인지 거친 숨소리인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열린 방문 틈사이로 보이는 이모와 남자는 벌거벗은 채 부둥켜안았다. 구멍 난 칸막이로 나누어진 또 다른 방의 냄새나는 술상 밑에서 소년은 잠을 자야했으므로 이모와 남자의 짓거리는 소년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광경이었다. “재상아, 일어나 학교가야지, 얼른” 소년을 깨우고 식은 밥덩이나마 챙겨 먹이며 소년을 학교에 보낸 것도 이모들이었다. 밤새 술을 마시고 몸을 팔아야했던 이모들의 그런 보살핌이 여간 쉽지 않은 정성이었다는 것을 소년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이모들에게 소년은 집에 두고 온 동생이었고 꿈에서라도 보고픈 피붙이 대신이었다. 첩질 에나 빼어난 능력을 보인 아비와 그런 서방을 향한 악다구니로 사는 것이 낙인 듯했던 여러 명의 새 어미들은 소년을 돌볼 기력이 없었다. “멋진 오빠, 술만 마시지 말고 말 해봐요. 이점례가 누군지? 응, 어서어서, 말을 안 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여자는 혀 짧은 소리와 함께 노골적으로 몸을 붙여온다. 그런데도 사내는 그것이 싫지 않다. 취기에 잠을 깬 욕정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인가. 회사 문도 닫고 아내의 원망과 채근에 쫓겨 온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내는 사내로 서고 있는 것이다. 참 난감하고 계면쩍다. “글쎄, 사실은 나도 몰라, 내 인생에서 이점례가, 백화가 누구였는지……. 마누라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내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마저 불분명하다. 어쩌다 임신을 하고 세태에 맞추어 결혼이란 제도에 삶을 끼워 넣은 것은 아닌지? 이모들처럼 울리지 않겠다고, 자식들을 소년처럼 외롭게 버려두지 않겠다고 살아버린 세월 같기만 하다. 지옥 같은 선술집을 소년은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시골 깡촌에서 대처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소년의 ‘빠삐용’은 이루어졌다. 고달픈 자취생활 속에서도 마음만은 편했다. 그 때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만났다. 아하, 이모들을 울린 영화가 바로 이 소설이었구나! 알아차렸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고 때마침 TV문학관을 통해 드라마로도 백화와 영달과 정씨를 만났다. 삼포? 그곳이 어딘지도, 적어도 방향정도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소년은 대학생이 되었다. 학비마저도 스스로 벌어야 하는 고달픈 고학생의 삶 속에서 소년은 이모들의 삶이, 이모들의 울음이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그들의 책임이 아님을,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천박한 자본의 세상에서 착취와 억압이 없이는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없는 기득권이 쳐둔 촘촘한 그물 탓이었고,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만이 강요된 세상의 그릇된 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유신은 교과서에나 있는 거짓 신화였으며 개발독재의 과실은 언제나 소수의 가진 자들 것이었다. 사내와 같은 밑바닥 출신들은 늘 그 과실을 위한 거름에 지나지 않았다. 겨우 소년에서 사내로 자란 풋내기에게 의식화는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이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가장 부끄러운 치부였으며 소위 먹물로서 회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사명이었다. 권력은 양심을 탄압했고 잡아다 고문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별을 달지 않기 위해서 사내는 권력에 의해 감옥 대신 군대에 갔다. 온갖 불합리와 인간성이 말살되는 현장, 해병대에서 사내는 명예라는 가치에 눈떴다. 가장 저급하고 더러운 병영에서 명예라니……. 그 비밀의 열쇠를 사내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가장 추악한 진창에서 험악하게 싸우다가 평생의 지기가 된 동기애가 그 비밀의 열쇠가 아닐까 사내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민주화를 향한 민심은 마침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독재의 아성은 무너졌다. 5공화국의 대머리 독재가 막을 내려가던 날의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과 백골단의 무자비한 몽둥이가 뼈를 부수고 살을 갈랐다. 골목으로 샛길로 쫓기다 숨은 곳으로 비닐봉지가 불쑥 내게 던져졌다. 봉지 안에는 하얀 우유와 두어 개의 빵이 들어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보니 보자기에 싼 쟁반을 들고 있는 여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대학생 오빠, 힘내요! 나도 아니 우리 모두 다 오빠들 편이에요” 그녀는 손을 흔들며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 누구세요?” 잡혀 끌려갈지 모르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 언제 지나다가 들러요. 오늘처럼 숨을 곳이 필요하면 오던지요 호호”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00다방이라는 간판이 동굴 같은 지하계단 입구 위에 걸려 있었다. “그럼 삼포라는 곳을 혹시 아세요?” 여전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호기심과 이런 어촌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봉에게 씌울 술값을 가늠하는 듯 한 눈빛으로 웃고 있는 여자에게 나는 또 불쑥 물었다. “아니 이점례는 뭐고 또 엉뚱하게 삼포라니? 대체 삼포가 뭔데요? 어디 지명인 것 같은데?”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수상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여튼 이상하면서도 재밌는 분이네, 이 오빠, 깔깔깔” “술이 취해서 그런지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소리 같네요. 흐흐흐” “거기가 어딘데요?” “나도 몰라요, 그런 데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 나도 어디에 있는지? .……. 몰라요. 아마 오늘도 그 삼포라는 곳을 찾고 싶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죠, 흐흐,.. 글쎄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내 인생에 삼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어떤지? 으으” “에이 시시하다, 그런 이상한 말 그만 하고 우리 술이나 마셔요. 나 오빠가 무척 맘에 드는데……. 우리 밤새 재미난 얘기나 하면서 술이나 마셔요 어때요?” “그럽시다, 날이 새도 마땅히 할 것도 없는 따라지 인생인 것을요, 자자, 마십시다.” 사내가 시위 현장의 그 다방을 찾은 것은 6.29 선언으로 성난 민심이 양은냄비처럼 들 끊다 금세 식어버린 여름날의 오후였다. 그날도 사내와 동료들은 거짓의 정치공작에 금방 가라앉은 시국을 안주 삼아 대낮부터 막걸리로 쓰린 속을 달랜 후였다. 동지들이 사라진 거리와 캠퍼스에서 사내와 동료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사내는 모처럼 최루가스가 없는 거리를 걸었고 걷다보니 다방 앞이었다. 조명 낮은 지하다방에는 몇몇의 손님들이 칠 벗겨진 싸구려 소파에 앉아 흔히 레지라 불리는 여자들과 희희낙락 농지거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입보다 더 바쁜 것은 레지들의 몸을 더듬는 그들의 손이었다. 이제는 이모들의 밤을, 이모들의 거친 숨소리를, 이모들의 울음을 알아버린 먹물 사내는 민망하기보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 우유와 빵을 던져준 그녀가 그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값싼 웃음을 실실거리고 있었다. “어마, 오빠 그 오빠 맞지? 최루가스 푹 뒤집어쓰고 담모퉁이에 쪼그려 숨어있던 그 오빠 맞죠? 맞네. “여기 커피 한 잔 주세요.” 사내는 수긍도 부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획 돌리며 퉁명스럽게 커피를 시킨다. “정말 커피 마시러 오셨어요? 저 보러 오신 거 아니구요? 호호, 알았어요. 잠깐만” 짙은 화장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소년의 집에 있던 이모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그 소년과 거의 같은 또래였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사내에게는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사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사내는 그녀도 많은 백화 중의 한 명이라고 마음속으로 우기고 있었다. 비록 다방에서 차를 나르며 웃음을 팔고 있을망정 최루가스를 뒤집어 쓴 몰골의 도망자에게 일용할 우유와 빵을 전해주었던 그녀는 사내에게 백화여야만 했다. 그 후로 사내와 그녀는 자주 만났고 늦은 밤 그녀는 사내의 자취방에서 피곤한 나신을 누이곤 했다. 곤한 잠을 잤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은 채 사랑을 했고 내일을 생각지 않으며 다음날을 기다렸다. 그들은 서로 생각하는 것을 숨기며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말을 섞었다. 사내는 졸업을 했고 직장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그녀를 잊었다. 잊기 위해 애썼다. 그녀 역시 그곳을 떠났고 그녀의 심정을 사내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문득문득 고개를 쳐드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괴로운 척 스스로에게 생색을 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생활이 애정을 지배하는 갑갑한 가정을 꾸렸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뵈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에,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불현듯 부끄러움이 가슴을 할퀼 때마다 사내는 백화의 악다구니 속의 남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사내는 점점 취해갔고 여자의 수작에 넘어가는 척,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욕정의 포로가 되어 갔다. 그녀의 가슴과 치마 속으로 서슴없이 손을 집어넣었고 은밀한 욕망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 사내는 한 때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이모들의 하룻밤 남자였으며 백화의 몸에 올라탄 그 숱한 수컷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몇 시간 전 빈털터리가 된 기억은 몽땅 잊어버린 짐승일 뿐이었다. 동은 터왔으나 사내는 아침바다를 보지 않았다. 취기는 욕정보다 먼저 절정에서 고꾸라졌다. “잘 잤어요?” 심한 갈증과 지끈지끈 쑤시는 두통에 어렵게 눈을 뜬 사내를 향해 어제의 여자가 곁에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그녀와 사내는 알몸이다. 여자와 사내는 술과 욕망과 이점례라는 알 수 없는 여자와 어딘지 모를 삼포를 빌미삼아 서로의 몸을 탐했을 것이다. 그녀와의 성애가 좋았는지 어땠는지 사내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살갗과 털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녀의 냄새만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느낌이다. 현실과는 동 떨어진 이 지랄 맞은 느낌이란 것을 사내는 어찌할 수 없다. “어서 일어나 삼포로 가야지요? 백화도 찾고……. 호호호” “무슨 소리지?” “호호, 당신이 어제 다 말해주었거든요. 삼포가 어딘지? 백화가 누구인지? 아직 찾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찾으러 가야한다고도 했구요. 자자, 일어나세요.” “저런, 내가 헛소리를 다한 모양이네 취했긴 취했군.” “아뇨, 난 재미있었는데……. 내가 백화가 되면 안 될까? 호호, 여기가 삼포라면 더욱 좋구요 히히” “쓸데없는 소리,.……. 물 좀 줘요.” 사내와 여자는 바닷가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고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등을 돌린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선창가에는 겨울바람이 세차다. “꼭 다시 와요”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는 또 다시 망설인다. 삼포? 삼포, 어디로 가야하지 중얼거린다. 정씨는 삼포가 고향이라 했다. 백화도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 흔한 고향조차 찾지 못하는 영달의 신세가 꼭 자신과 닮았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 어미의 모성이 올곧이 기다리고 품어주는 곳이 아니던가. 사내는 그 고향이 없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그토록 경원시하던 천민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사내는 언젠가부터 더욱 추잡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내의 말이 맞았다. 한 방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느새 그는 백화를 잊고 삼포를 잊고 말았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께요.” 백화는 말했지 않은가. 그런데 사내는 그 삶의 원형을 잊고 인간의 모성을 잊은 채 가짜에 현혹된 삶을 살아왔던 거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고향을 묻는 정씨의 물음에 답하는 노인의 따끔한 충고가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듯 사내의 가슴을 찌른다. 언제부터 나는 삼포를 잊었나?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정씨가 고향인 삼포를 잃은 것은 산업화, 개발로 인한 강제적 실향, 바로 ‘객지’의 삶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실향(失鄕)인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삶이 자기 스스로 택한 실향이라는 자책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다. 삼포는 아니 보인다. 내리는 눈의 장막에 바다는 뿌옇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잘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사내는 자신이 영달의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다 생각한다. 쌓인 눈이 길을 지우듯이 ‘삼포 가는 길’은 도대체 어딘지 모르겠다. 사내는 어제 그 포차 앞에 그대로 서 있다.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할지 모르는 까닭으로……. 이 글은 예스24의 제8회 블로그축제 응모작입니다. *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비롯한 초기의 장․단편들은 제가 세상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고 부조리한 세상의 적나라한 모습을 깨닫게 해준 삶의 엑스레이 필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소설들은 늘 인생의 고비마다, 내가 외롭고 흔들릴 때, 혹은 물질의 유혹과 몰염치한 욕망 앞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도록 해주는 파수꾼이자 버팀목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 인생의 책 중에서 맨 앞에 놓인 항법도 같은 소설이자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지요. 이런 이유로 예전의 블로그축제에 이미 글을 쓴 바가 있어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소설의 형식을 감히 빌어보았음을 밝힙니다. 다음은 예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부의 팽창과 편중만을 위해 움직이는 자가 번식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가진 자만을 위해 기능하도록 철저히 설계된 자본의 그물망 속에서 애초부터 가지지 못한 군상들에게 삶이란 선택이 아니라 모진 생존의 현장일 뿐이었습니다. <삼포 가는 길> <객지> <돼지꿈> <섬섬옥수> 등 황석영의 단편 속에서 만나는 문제적 개인들은 바로 그 생존 현장에서조차 쫓겨나고 내동댕이처진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었고 억울한 삶의 희생양이었던 것이지요. 6, 70년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 배우지 못한 자들은 이제 고향마저 빼앗긴 채, 막장과 막노동판과 공기구멍조차 없는 밀폐된 좁은 공간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꿈은커녕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그들에겐 위법이었지요. 사람으로서의 대접은 고사하고 그저 일한 만큼의 삯을 제때 받아 굶지 않고 사는 것, 그 유일하고 소박한 바람조차 세상은 그들에게 용납지 않습니다. 비정한 자본과 그 기생의 무리들에 의해 인간은 공사판의 철근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했지요. 그 즈음 황석영의 단편들은 이처럼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불쌍한 인생들을 통해 세상의 진면목을 바로 보도록 해준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비단 황석영뿐이었겠습니까. 일일이 거명할 수도 없는 많은 작가들의 소설들은 우리의 분단현실로부터 이념과 피식민의 참상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사회의 충돌과 갈등으로부터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좌절의 숙명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진실들을 깨우쳐준 삶의 나침반이었습니다. 내게 있어 소설은 곧 삶 베끼기(모방)를 넘어 현실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날카로운 시선으로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탁월한 형상력을 발휘해온 중견작가 황석영. 오래된 정원 으로 얼마전 우리 곁에 오랜만에, 반가운 작품으로 다가왔던 그의 지금까지 중ㆍ단편들을 모은 작품 집이다. 거친 듯 하면서도 정감이 글 사이사이에 담겨 있는 그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품위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01. 한씨 연대기
02. 낙타누깔
03. 밀살
04. 기념사진
05. 이웃 사람
06. 잡초
07. 삼포 가는 길
08. 돼지꿈
09. 야근
10.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11. 섬섬옥수